백두산 전설24

신선봉

천지를 에워싼 산봉우리들이 모두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벼랑들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상 맨흙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도 있다. 백운봉과 지판봉사이에 이런 흙봉우리가 있는데 사람들은 신선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두산의 서쪽기슭에 류씨라는 성을 가진 초부와 공씨라는 성을 가진 초부가 한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류씨는 어머니의 병시중으로 고생이 막심하였고 공씨는 아들의 병시중으로 고생이 막심하였다. 하여 두 집에서는 하루건너 약재캐러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루는 그들이 달이 뜰 때까지 산속에서 떠나지 못하였다. 교교한 달빛에 잠긴 밤경치는 아름다웠어도 이따금 울어대는 밤새소리를 구슬프게 들려왔다. 그들이 배낭을 수습하여 떠날 무렵이었다. 아리송하게 바라보이는 백두산의 흙봉우리에서 무엇인가 읊조리는 소리가 간단없이(=끊임없이-운영자 주) 들려왔다. 하도 이상하여 류씨와 공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흙봉우리를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술상을 차려놓고 둘러앉아서 잔을 기울이며 말을 나누는 것 같았다. 그들이 호탕하게 웃을 때면 그 웃음소리가 류씨와 공씨의 귀에까지 낭낭하게 들려왔다.
"형님, 우리 올라가 보기요."
"아니, 이런 밤에."
"밤이면 어떻소. 우리 고향의 산인데."
류씨는 공씨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들은 땀을 흘리며 산봉으로 올라갔다. 봉우리에 다 올라가보니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고 짙은 향기만 가슴에 몰몰 안겨왔다.
"동생, 이게 어찌된 영문이요?"
"글세요. 방금까지 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허수(=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후부터 그들은 밤이 되기만 하면 버릇처럼 그 산봉우리를 살펴보게 되었다. 삼라만상이 고요한 달빛에 잠들면 전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나곤 하였다. 신비한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고 신비한 것을 만나면 누구나 집요하게 달려들어서 밝혀보려고 하기 마련이다.
"동생, 이렇게 합세. 우리 내일 낮에 쥐도 새도 모르게 저 지판봉으로 올라갑세. 알맞춤한(=알맞은-운영자 주) 곳을 찾아서 은신하였다가 그 내막을 알아냅세."
"형님 생각이 내 생각과 똑같소!"
"하하하..."
둘이는 통쾌하게 웃고 헤어졌다.

이튿날, 류씨와 공씨는 먹을 것을 푼푼히 싸가지고 지판봉으로 올라갔다. 마침 흙봉우리 맞은 켠에 널찍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그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마침 대보름날이었다. 둥근달이 중천에 걸리자 흰 수염을 드리운 늙은이들이 흰 두루마기를 날리며 하늘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들은 널찍한 방석돌 위에 빙 둘러앉아서 풍토경물이나 인간세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약에 대한 담론을 꺼내고 있었다. 늙은이들은 모두 신선들이었다.
류씨와 공씨는 숨을 죽이고 신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삼, 불로초요 자삼, 영지요 하고 숱한 약명들을 나렬하는가 하면 가지가지 영양들의 배합비례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오가는 말들이 푸른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거침이 없는데다가 수백종의 명약에 대한 말들을 하루저녁에 듣고나니 류씨와 공씨는 한마디도 똑똑히 기억할 수 없었다. 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오기 시작하자 늙은 신선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형님, 신선들이 다 갔소. 우린 여기서 자기요." 류씨가 이렇게 말하며 공씨를 돌아보니 그는 벌써 꿈나라에 가서 헤메고 있었다. 류씨가 눈을 떴을 때에는 동산에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형님, 해 떴소. 빨리 일어나오." 류씨는 공씨를 흔들어 깨웠다. 공씨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형님, 엊저녁에 신선들이 놀던 곳에 가보기요." "양."

류씨와 공씨는 경건한 심정으로 신선들이 모여앉았던 흙봉우리로 올라갔다. 신선들이 간밤에 외우던 명약들이 거기에 무더기로 자라나고 있었다.
"야! 야!" 연신 감탄하는 공씨의 눈길에는 탐욕스러운 빛이 넘쳤다.
"동생, 이게 모두 명약이요. 빨리 캐가지고 가기요."
"형님, 대낮같이 밝은 세상에서 임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약을 캐가서 되겠소?"
"야, 참 답답하오. 동생이나 나나 다 병시중에 바쁜 사람들인데 언제 그런걸 다  헤아리겠소. 자 빨리 캐기요."
"형님, 사정은 그렇지만 이건 더구나 신선들의 약이란말이오." 공씨는 류씨의 말을 귀밖으로 들었다. 신선이고 임자고 할 게 뭔가. 제집의 병이나  떼고 볼판이지. 이 좋은 약을 캐지 않으면 무엇을 캐겠는가.  류씨야 캐든말든 공씨는 약초에 손을 대었다. 그는 큰 약초를 고르느라고 마구  짓밟아치며 부산스럽게 돌아쳤다. 약뿌리를 중태기에 골막하게(=다 차지 않고 좀 모자란 듯 하게-운영자 주) 채우고서야 공씨는 손을 툭툭 털었다.

공씨는 누가 쫓기라도 하듯이 "나는 먼저 가네. 자네도 빨리 캐가지고 따라 나서게."하고 말하였다. 공씨는 인차 자리를 떴다.
류씨는 공씨의 행동이 오늘따라 이상스러웠다.
"아니 저 형님이 오늘은 어찌된 일인가?" 류씨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그가 서너발자국을 내디뎠는데 공씨가 걷고 있는 곳에 일진광풍이 일었다.
(신선들이 노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 류씨는 돌아서서 공씨가 짓밟아놓은 약초들을 한포기 한포기씩 바로잡아 세우고 뿌리에다 흙도 꽁꽁 덮어주었다. 그는 약포기들을 다 손질해놓고서야 허리를 폈다.

남쪽하늘에서 오색구름이 그를 향하여 둥실둥실 떠왔다. 구름이 그의 곁에까지  날아오자 구름 속에서 한 늙은이가 내리였다. 흰 수염이 앞가슴을 덮은 늙은이는  3절죽장을 짚고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류씨는 늙은이에게 인사를 드리고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과를 이야기하였다.  류씨의 이야기를 듣고난 늙은이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예의범절이 밝아서 하늘의 도움을 받을거고  제자식만 중하게 여기는 공씨의 심보는 고약스러워 필시 하늘의 조롱을 면치 못할 것이로다."
그리고는 류씨에게 명약 몇종을 골라주면서 쓰는 방법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류씨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머리를 드니 백발늙은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신선의 도움을 받은 류씨는 감개무량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가 첫발자국을   옮겨놓으니 발밑에서 구름이 일었다. 구름은 류씨를 싣고 백두산 서쪽기슭까지 둥둥   떠갔다. 마을근처에까지 이른 구름은 류씨를 내려놓고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류씨는 구름속에서 내리자마자 "사람 살려요!"하는 부름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앞이 아츠란(=아득한-운영자 주) 소나무꼭대기에 공씨가 걸려있었다. 류씨는 나무우에 올라가서 공씨를 거들어 내려오게 하였다.
그는 너무도 어이없어서  "참, 형님은 무슨 욕심을 그렇게 부리는건가요."
"글세, 나도 모르겠소."  공씨는 뒷머리를 썩썩 긁으며 무참해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류씨는 늙은 신선이 가르쳐주던대로 약초를 배합하여 약을 끓였다.
"어머니, 이 약은 신선이 알선하여준 약입니다. 사흘만 자시면 병이 떨어질  것입니다."
과연 사흘이 지나자 류씨 어머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가사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류씨네 집안에서는 오래간만에 웃음소리가 그칠사이없이 울렸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흙산봉우리를 신선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허명철로부터 안도현 소사하에서 81년 2월 리천록,최룡관(연변) 수집-